여행 이야기/2010년대

영국여행 2013년 3부 가족사랑 여행사랑(7월17일~24일)

매직랜즈 2020. 12. 22. 11:22

영국 가족 여행, 3장 가족사랑, 여행사랑 717(), 목사 님 ! 안녕!

 

역사 속 영국의 오늘

1945년 영국, 미국, 소련 수뇌 포츠담 회담 개최(전후 독일과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 협의)

 

지난 보름정도 아침식사 이름이 스코티시 블랙 퍼스트였는데, 똑같은 내용의 소시지, 베이컨, 계란 반숙,

콩 등이 있는 아침 식사이지만, 오늘 아침에 먹는 식사는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이다. 같은 영국이라는

나라이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에게 굴욕적으로 합병되고, 과거 많은 침략과 학살을 받은 탓에

그 역사적 앙금은 오래토록 가슴에 멍울이 되어 내려오고 있어, 진정한 통합의 나라로 되기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잉글랜드의 아낌없는 포용과 희생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아직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포용은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것같다. 마치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에 정식 사죄를 안 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것처럼. 이 나라의 화폐도 잉글랜드에서 발행한 화폐는

‘Bank of England’에서 발행되었다고 인쇄되어 있고, 스코틀랜드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스코틀랜드 은행에서

발행한 화폐와 잉글랜드 화폐가 같이 사용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화폐를 잘 받지 않는다.

스코틀랜드 은행 발행 10파운드와 20파운드,잉글랜드 발행 50 파운드 .

 

스코틀랜드 은행에서 발행한 화폐와 잉글랜드 은행 발행 회폐의 가치는 같다.

통합이 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완전한 통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번 가을 독립에 관한 스코틀랜드

국민의 선택과 잉글랜드의 대처가 궁금하다.

쇠가 두드리면 더 단단해지듯이 현재까지의 스코틀랜드는 자기만의 언어인 게일어를 영어와 함께 사용하며

스코틀랜드인임을 자랑스럽게 강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인에게 Do you s peak English? 하면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Are you English man? 하면

모욕으로 느낀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좋은 건물은 교회이거나 학교일 정도로 교육열은

이스라엘과 더불어 매우 강해 교육에 의한 민족 자긍심을 키워 나가는 힘은 대단하다.

 

10시에 도착한 하드리안 방벽 관람 센터(Chester’s Roman Fort)는 로마인들의 진지 내부의 여러 시설을

보여주고 있다. 병사들의 막사, 욕실 등의 유적과 그 시대의 유물을 보여 주지만 정작 보고 싶은 방벽은

이 센터 부근에서는 다 허물어져 없다.

@사진 1: 동서를 가로질러 쌓은 방벽 지도. 사진 2,3: 그 시절의 유물들. 사진 4,5: 로마 시절 발달한 목욕 문화는 군인들이 다른 생각을 안 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안내를 받아 보니 여기서 10Km정도 떨어진 다른 센터를 방문하라고 하여 다시 길을 나서 찾아가는데 네비게이션이 학교의 운동장으로 안내하는 실수도 했지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방벽 탐험에 나선다.

센터에서 방벽까지는 오르막 경사 길을 약 1Km정도 가야 하는데, 주변에 양들이 방목되어 있어 길 주위가 지뢰밭이다. 오늘은 기온도 28도까지 올라가는 더운 날인데, 양들의 배설물 냄새도 많이 나고 더워 좀 짜증나기도 했지만 과거에 이 천리장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15만 명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하니 겸손해진다.

@양들의 침묵. 더워서 그늘에서 휴식하고 있다.@방랑 이 삿갓이 시 한수 하려다 더워서 포기한다.

키가 크고 힘이 세며 몸에 문신을 하고, 긴 창을 사용하는 스코틀랜드인을 로마 병사들은 매우 두려워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서쪽 칼라일에서 동쪽의 뉴캐슬까지 118Km의 이 방벽을 쌓았는데 AD122년에

완성된 이 방벽은 영국의 동서간의 거리 중 가장 짧은 코스를 택하여 쌓아졌다. 그 당시의 측량 기술이나

토목기술이 현대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방벽을 쌓기 전 이 근처에서 국경 수비를 하던

9개 사단의 병력 중 3개 사단이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며, 방벽이 완공된 해인 122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금도 뉴캐슬 지역의 버스 중에는 AD122번 버스가 다닌다.

 

다음 행선지로 가기 전 근처의 성 오스왈드 티 카페(St. Oswald’s Tea Room)에서 저렴한 가격에 아주 만족한 점식식사를 한다(26파운드). 우리 가족은 아직 종교를 가지지 않았지만 목사님과의 영국에서의 마지막 식사이어서 특별히 기도를 부탁하니 우리 가족의 남은 여행 기간 안전하고 건강한 여행과 한국에서 잘 생활하기를 기도해 주신다.

@간단하면서 맛있던 점심! 목사님과의 마지막 식사

차를 달려 뉴캐슬 남쪽으로 가니 고속도로 상에 우리가 보고자 했던 천사의 날개상 (Angel of the north)’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가까이에서는 전체의 모습을 다 화면에

담을 수 없어 후방으로 한참 이동하여 사진을 찍는다. 이 천사 상을 설치했던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글과

그림을 보니 하부에 20미터의 깊이로 120톤의 콘크리트를 부어 구조물 보강 작업을 하였다 한다.

 

Antony Gormley라는 조각가에 의해 19977~19982월에 완성된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천사의

조각상이다. 200톤의 철이 사용되었으며 날개의 길이가 54미터로 점보제트기의 날개 길이와 비슷하다.

@빨리 찍어줘! 200톤을 들고 있으니 힘들어!

천사 상 바로 아래 발 부분에는 각종 낙서가 많은데 다행히 우리 글씨는 안 보인다. 누구와 누구는 사랑한다는

글부터, 나는 나를 수 있다, 누가 여기를 다녀갔다는 내용 들이 지저분하게 써져 있지만 천사 상의 가치를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아직 열차 출발 시간인 458분까지는 시간이 남아 차를 몰아 타인강 주변 주차장에 주차한 후 타인강의

큰 다리(Tyne Bridge)를 건너가면서 도시의 경관을 감상하고 다시 작은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돌아오며

잠시의 여유를 가져 본다.

@뉴캐슬의 아름다운 타인 강변 풍경 @주차하는 시간만큼의 요금을 기계에 넣고 주차권을 뽑은 후 차 안의 유리에 붙이면 됩니다.

근처의 ‘The Great North Museum’에서 자연사와 로마 방벽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본 후 뉴캐슬 중앙역으로 가서 목사님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탑승 준비를 한다.

17일 동안 우리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수고해주신 목사님의 노고에 너무 감사한다.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각 지역의 소개 그리고 종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설명은 전문 가이드라고 해도 이만큼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우리를 안내해 주셨고 덕분에 아주 알찬 시간을 보냈다. 한국으로 곧 나오실 계획이 있다고 하여 8월 중순에 서울에서 만날 약속을 했지만 이별은 늘 아쉽기만 하다.

@7월 1일부터 17일까지 3000Km 이상의 도로를 달리면서 열정적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신 고마운 목사님!

 

7월 1일~16일까지 다닌 스코틀랜드에서의 사진들.

718(), 윈즈, 바스, 스톤헨지

 

역사 속 영국의 오늘

1955년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 정상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

(2차 대전 후의 독일 통일문제, 군비 축소를 논의했으나 합의는 못함.)

1817년 소설 오만과 편견의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 사망

 

오늘은 이번 여행 나와 처음으로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는다(생각해 보니 72일 아플 때 죽을 끓여 주기도 했군). 어제 저녁 도착 직후 사온 식품으로 여행 중 익숙해진 토스트와 계란, 베이컨, 과일로 식사를 하고 가이드투어를 시작한다. 오늘은윈저 성 바스 스톤헨지를 다녀올 예정인데, 이동선이 길어 아침 8시부터 숙소에서 출발한다.

 

자전거 나라의 여성 가이드분이 차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안내하는데, 열정이 보이는 듯하다. 오늘 관광할 목적지들은 주차장과는 거리가 있어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차를 주차하고 돌아와서 열심히 설명해 주고 다시 차를 가지고 와서 출발하기를 반복하는데 정말 수고가 많다. 지난달 말에는 날씨가 추워 등산복 자켓을 입고 다닐 때도 많았는데 오늘은 이번 런던 여행 중 가장 더운 날씨이고 이동거리가 길어 피곤한 하루가 될 것 같다.

 

윈저 성은 런던에서 서쪽으로 가야하며 히드로 공항을 지나게 된다.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이 이용하는 1터미널과 4터미널은 면세 구역에 명품이 없어 공항에서 귀국 쇼핑을 생각하면 실망할 수도 있단다. 아내가 귀를 쫑긋거리며 듣는다.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스강(River Thames)은 길이가 350Km의 강으로 윈저 상류150Km가 발원지이며 바다가 가까워 밀썰물이 생겨 강물이 범람하기도 해서 하구 둑을 쌓아 범람을 막았다고 한다.

윈저 성은 여왕이 공식적으로 머무는 3성 중 하나이며, 여왕이 머물 때면 로열 스탠다드 깃발이 걸리는데 깃발이 안 보이니 오늘은 여왕이 이곳에 없는 것 같다. 900년의 역사를 가진 윈저 성은 처음에 방어용 성으로 만들어져 외부로 향한 창이 십자형 좁은 창인데, 1800년대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를 했고 영국에서 다녀본 성 중 가장 비싼 입장료를 내었다(성인 17.7파운드). 이곳은 상주인원이 160명으로 현재 운영 중인 성중에 가장 인원이 많다. 성 입구에는 대영 제국의 기초를 세운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서있다.

 

최근 여론조사를 한 결과 존경 받는 영국 왕 1위부터 3위까지가 여왕이며(1위 현 여왕, 2위 빅토리아 여왕, 3위 엘리자베스 1) 4위는 헨리 8, 5위는 헨리 2세라고 하는데, 현 왕조는 영국의 8번 째 왕조로 후대가 끊긴 앤 여왕의 먼 친척인 독일계 하노버 출신 왕의 후손들이다. 영국 여왕의 올해 연봉은 650억으로 책정되어졌다고 하여 그 액수가 많아 깜짝 놀랐다. 그런데 자세히 알아보니 피카딜리 서커스와 옥스퍼드 서커스 등지의 노른자위 땅이 왕의 땅이며, 조지 3세부터 의회에 위탁하여 관리하였으며 그 수익금의 15%정도를 왕의 연봉으로 받는다. 노동당 집권 시절에는 여왕의 연봉으로 논란이 많이 계속 동결하다 보수당이 집권하며 연봉을 올렸고 내년에도 인상이 예상된다고 한다. 입헌 군주제에 대해서 여전히 논쟁이 많지만 최근 왕실의 경사가 많아(여왕의 재임 60주년 및 대관식 60주년과 왕세손의 임신과 출산) 국민들의 여왕과 그 가족에 대한 애정도 높아지고 있다.

 

내부의 시설에서는 가이드의 설명과 사진 촬영이 금지되며 대신 영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는데, ‘자전거 나라에서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나누어 준다. 내부에는 공주를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난감들이 전시된 방, 파인애플로 장식된 것처럼 꾸민 화려한 도자기들, 접견실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황금 호랑이와 빅토리아 여왕의 조각상, 무도회장, 현 여왕의 접견 대기실과 접견실 등이 있다.

 

내부 시설을 보고 채플에 들려 이곳 채플에 있다고 하는 헨리 8세의 무덤도 확인하고 나오니 11시 근위병 교대식이 시작된다. 더운 날씨에 털모자까지 쓰고 고생이 많다. 우리는 근위병 교대식을 여러 나라에서 여러 번 보았기에 간단하게만 보고 정문을 나간다.

성 밖으로 나오니 예쁘게 차려입은 아가씨 두 명이 바구니를 들고 있어 알아보니 이 동네의 중세 옷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가게 직원이며 같이 사진촬영을 하겠다면 1파운드를 내야 한다.

 

다음 목적지인 바스까지는 1시간 30분이 소요되기에 여기서 간단히 점심 대용 빵과 샌드위치를 사서 이동 중에 해결하고 바스로 간다.

바스에서 꼭 봐야 할 곳은 세 군데로 바스 목욕탕, 1700년대 상류층 휴양 별장, 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 촬영 시 지베르경감이 마지막에 자살하던 장면을 찍은 다리이다. 바스는 인구 8만의 소도시이지만 100만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인기 많은 도시이며 영국 유일의 온천지역이다. 옛날 나병에 걸려 이곳에서 살던 귀족이 자신의 애완견이 물에 빠지자 구하려고 온천물에 들어갔는데 나병이 나았다는 구전 설화가 내려온다.

 

바스의 로열 크레센트건물은 길이가 180미터의 반원형 건물로 30채의 귀족 별장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보호 단체에서 사용한다. 건물의 내부는 입주자의 취향에 따라 변경이 가능했지만, 외관은 엄격히 설계안에 따르도록 하여 지었는데, 좌우의 끝집들은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다.

 

@ 사진 1:  한 잔에  50 페니의 온천수 시음 장소 .  사진 2:  호텔 내부의 온천수 욕장 ( 옥상에 정식 목욕장이 따로 있다 ).  사진 3: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다리를 닮은 다리 .  사진 4:  닐 암스트롱 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거리의 가수 할아버지

바스 목욕탕으로 가는 길에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박물관이 나오는데, 제인 오스틴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류 작가로 내년에 발행되는 10파운드 지폐는 다윈을 밀어내고 그녀가 올라갈 예정이라고 한다. 1801년부터 1805년까지 이곳 바스에서 살았으며 그녀의 마지막 작품 설득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박물관 앞에 분장한 남자 분에게 오만과 편견의 디아시입니까?’하고 물으니 가끔 그렇단다(숙소에 돌아와 오늘의 역사를 보니 1817년 오늘 소설 오만과 편견의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이 사망한 날이다).

 

바스 목욕탕은 아직도 많은 양의 온천수가 나와서 사용하고 남는 물은 에이번강에 버려진다고 한다. 과거 바스의 온천지역은 에이번강의 범람으로 그 흔적이 사라졌으나 1800년대 초반 다시 발견되어 현재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 목욕장이 있는 건물에 들어가니 습도가 높아서인지 땀이 난다. 한 컵에 50페니의 온천수 한 잔 마시고 욕장 사진을 찍고 나온다.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12일 하면서 온천욕도 하고 여유롭게 지내고 싶은 곳이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스톤헨지이다. 아직도 이곳의 정확한 용도가 뭐였는지 학자들 간에는 논쟁이 많으나, 최근에는 피어슨 교수의 주장인 종교의식을 행하는 장소의 일부라는 설이 유력하다. 4500여 년 전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이곳 스톤헨지는 인근의 우드헨지에서 산자들을 축복하고 스톤헨지에서는 죽은자를 축복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스톤헨지에 사용된 돌은 무게가 최고 45톤에 달하며 사르센 석과 부루 스톤이 시용되었으며 부루 스톤은 웨일즈 지방에서 먼 길을 운반되어져 왔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 주변 2800Ha에는 스톤헨지와 관련된 미 발굴유적이 있어 현재에도 발굴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고 이곳을 대규모 관광지로만들려고 진행중이다.

 

스톤헨지에서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은 두 시간 이상 걸리는데 피곤하여 잠시 졸았더니 가이드와 큰아들은 런던 생활에 대해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719() 세 븐시스 터즈 . 가족사랑 여행사랑!

 

역사 속 영국의 오늘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가 나일강변에서 로제타스톤 발견(2년 뒤 영국군에 패배

하면서 돌은 영국으로 넘어가 영국 박물관에 보관됨.)

 

오늘의 투어는 히브 성 세븐시스터즈 절벽 브라이튼으로 어제와 마찬가지로 런던에서 약간 먼 지역을 차로 이동하면서 관광하고 런던으로 두 시간 정도 걸려돌아오는데, 단기 여행자가 많은 런던 관광의 특성에 맞춰 현지 여행사에서 개발한 상품인데,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23일 정도의 일정으로 차를 이용해 다니면 훨씬 알찬 여행이 될 것 같다.

 

어제 투어 종료 후 들른 한인 슈퍼에서 산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집을 나선다. 오늘 가이드 해 주실 분이 나와 연배가 비슷한 분이어서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데 영국에서 10년 정도 생활하고 계신 분이다. 이번 여행에서 어제까지 큰아들이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는데 오늘은 내가 앉는다.

 

 

첫 방문지인 히브 성(Hever Castle)은 당초에 방어용 성으로 지어졌는데 귀족들이 생활하는 성으로 사용되다가,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의 아버지가 1504년 소유하게 된다. 첫 부인과 이혼한 헨리 8세는 이곳에서 앤과 사랑을 나눴고 나중에는 불륜이라는 죄명으로 앤을 단두대로 보내고 난 후 네 번째 부인에게 넘겨준 성이다.

 

 

입장료가 인당 15파운드이어서 50파운드 지폐와 10파운드 지폐 한 장으로 지불하니 50파운드 지폐를 형광펜으로 그어 본다.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방법으로 형광펜으로 그어 흔적이 없어야 된단다. 보통 10, 20파운드 지폐가 많이 통용되며 50파운드 지폐는 보기 어렵다.

 

성의 정원은 이태리에서 가져온 각종 조각물과 예쁜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1900년대에 미국인 부호가 인수하여 큰 호수를 만들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성의 주 출입구에는 앤 불린 복장을 한 여인이 출입 인원을 조절하고 있는데, 아내는 같이 사진 한 장을 찍는다.

 

내부에는 가이드투어가 금지되어 있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는데, 헨리 8세와 그의 부인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의 사진이 있다. 나중에 왕이 된 메리, 에드워드 6,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사진들이 특히 잘 전시되어 있다. 아내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나를 보는 감시하는 녀석의 눈초리가 따갑다. 혹시 나를 가이드로 의심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여행에서 특히 헨리 8세에 대해 공부를 약간 한 나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헨리 8세와 그의 부인들 자료가 빈약하여 이곳의 사진을 너무 찍고 싶은데, 지키는 녀석이 도끼눈을 뜨고 나만 보는 것 같아 그만둔다. 파리에서는 모나리자의 미소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너희들은 무슨 신비주의에 사로잡혔냐?

 

아버지 시대에 종료된 30년 장미전쟁을 보아온 헨리 8세는 더 이상의 분열을 막기 위해 강력한 군주가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부국강병을 하여 나라를 통치하였다. 자신이 이룩한 강력한 왕국의 왕권을 아들에게 세습하고자 열심히 노력했지만 세 번째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고 나머지 부인들은 이혼하거나 단두대에 보내졌다. 세 번째 부인에게서 난 하나 뿐인 아들도 선천성 병으로 일찍 죽는데(1537~1553), 초상화에 그려진 그의 모습은 새처럼 가는 다리에 병약해 보인다.

 

히브 성을 나서니 12시가 되어가는데, 근처의 식당과 세븐시스터즈절벽이 내려다보이는 비치헤드의 식당을 추천받고 비치헤드까지 가서 식사하기로 한다. 손님이 많아 식사를 시키고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을 내려가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다시 들어와서 식사를 하고 세븐시스터즈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어서 내려간다.

사진 1:  비치헤드의 식당 .  사진 2: 1939~1945 년 사이 벌어진  2 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영국 공군의 희생을 기리는 조각 .  사진 3:  아찔한 절벽 아래 보이는 등대 .  사진 4:  오늘 먹은 점심 .

완만한 내리막길이긴 하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고 절벽을 따라 가는 길이라 아찔함을 느끼며 걸어가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며 장풍을 날려본다.

 

오늘의 날씨는 쾌청하고 약간 더운 편인데 세찬 바람 덕에 시원하게 절벽을 감상할 수 있다. 예약할 때 오늘이 미술관투어 일정이었고 629일에 이곳을 오기로 예약했는데, 현지 여행사 측의 사정으로 두 날짜의 계획을 서로 바꾸어 주고 대신 오늘은 단체투어 비용으로 단독투어를 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날씨 덕을 잘 본 것 같다(629일은 제법 추웠는데 그날 이곳에 왔으면 바람과 추위에 고생했을 것 같다).

 

하얗고 작은 돌이 많아 그 돌로 잔디 위에 내 책의 제목인 가족사랑 여행사랑을 쓰자고 하니 가족들은 창피해하며 주저하기에 내가 먼저 쓰기 시작하니 아내가 동참하여 마무리 한다. 두 번째 나올 책의 표지 사진으로 하면 좋을 듯하다. 내려오다 생각하니 글씨를 세븐시스터즈 방향으로 쓰고 그 배경을 이용해 가족사진을 찍었다면 더 완벽한 사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미완성의 인생에 좋은 추억하나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며 언덕을 내려간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분필’의 작은 조각들로 우리의 흔적을 남겨본다!

 

현재도 파도와 바람에 의해 침식중인 이 절벽은 8번째 하얀 절벽을 만드는 중이며 100년 후쯤이면 에잇시스터즈가 될 전망이란다. 프랑스 쪽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오면 영국 남부 지방의 이 하얀 백악질 절벽(White Chalk Cliff)을 볼 수 있는데, 이 절벽으로 영국은 앨비언(Albion-하얀 나라)이라는 애칭

을 갖게 되었고 애정과 애국심으로 부를 때 많이 사용한다. 비치헤드에서 세븐시스터즈 근처까지 내려가니 가이드 선생님이 차를 이동시켜 주차해 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목적지인 브라이턴(Brighton)은 해변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데 가는 길 중간 중간 하얀 절벽이 계속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브라이턴은 부산 해운대처럼 여름에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해변 휴양 도시로 잉글랜드 남동부를 찾는 사람들이 꼭 들려보는 곳이다. 대관람 차 아래는 백사장이 아닌 자갈밭인데 많은 사람들이 햇빛을 즐기고 있었고 성급한 사람들은 물속에서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 있다. 지도를 보니 어제 들른 스톤헨지나 여행 첫 날 보았던 캔터베리 지역과도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두 시간 걸려 런던으로 돌아와 친절하신 가이드분과 헤어지고 아파트 근처의 슈퍼에서 간단한 과일 등을 사서 저녁 대용으로 해결하고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하얀 절벽과 바람, 그리고 그곳에 흰 돌로 적은 우리의 이야기는 오래 기억될 듯하다.

 

오늘은 헨리 8세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헨리 8

1455~1485년에 걸쳐 벌어졌던 왕위 쟁탈전인 장미전쟁은 랭커스터가의 헨리 7세가 요크가의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맞아들여 튜더 왕조를 열면서 끝나고 헨리 8세는 둘째 아들로 태어나지만 그의 형이 요절하여 형수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정치적인 이유로 결혼한다. 그러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혼을 하며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결혼한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이 결혼을 무효화 하려하자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갈라서며 영국 성공회를 만든다. 그의 결혼 경력은 아래와 같다.

헨리 8세와 여섯 왕비

1부인 : 아라곤의 캐서린(에스파냐 왕 페르난도 2세의 딸인 그녀는 헨리 7세의 맏아들 아서와 결혼했으나 사별하고 그의 동생 헨리 8세와 정치적 결혼. 그러나 메리 공주를 낳고 아들이 안 생겨 이혼, 6살 연상)

 

2부인 : 앤 불린(아라곤의 캐서린의 시녀 출신,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음.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성공회의 수장이 되도록 지원한다. 1536년 왕자를 사산하고 왕자를 열망한 헨리 8세에 의해 간통과 남동생과의 근친상간의 죄명으로 처형된다. 16세 연하-영화 천일의 앤의 주인공인 왕비)

 

정부 : 메리 불린(관능미의 외모를 가진 메리 불린은 언니인 앤 불린보다 먼저 헨리 8세의 마음을 사로잡고 아들을 낳았으나 언니의 계략으로 아들은 사생아가 되고 언니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를 친자식

처럼 키운다.)

 

3부인 : 제인 시모어(앤 불린의 시녀 출신,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 병으로 사망. 여섯 왕비 중 유일하게 헨리 8세와 같이 묻힌 아내. 에드워드 6세는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임, 16

연하)

 

4부인 : 클래브스의 앤(독일 공작 요한 3세의 딸로 정치적 결혼, 사진보고 결혼했으나 실물이 엉망

이어 이혼, 23세 연하)

 

5부인 : 캐서린 하워드(클레브스의 앤의 시녀 출신, 왕비가 되기 전부터 불륜. 처형, 31세 연하)

 

6부인 : 캐서린 파(두 번 결혼한 경력, 두 남편과 사별 후 세 번째로 헨리 8세와 결혼, 전 왕비들의

자식들의 교육에 정성을 기울임. 1547년 헨리 8세가 죽자 옛 애인과 결혼함. 21세 연하 )

 

영국에 이런 노래가 있다고 한다.

소박맞고요, 목 잘리고요, 앓다가 죽었대요, 소박맞고요, 목 잘리고요, 무사히 살았대요~~’

이처럼 헨리 8세는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버지가 이룩한 40년 장미전쟁의 종결을 통해 안정되고 강화된 튜더왕조를 열면서 아들의 역할을 크게 중요시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후 딸인 메리가 왕위에 오를 경우 혼란해질 정국을 염려해서 아들을 낳기 위한 그의 정치적 논리와 호색한에 다혈질이며 변덕쟁이 기분파이며 운동, 사냥에 다재다능한 그의 성격이 맞아 떨어진 결과라 하겠다.

 

헨리 8세의 죽음도 미스테리이다. 사냥하다 낙마하여 부상을 당해 그 후유증이 심각해 56세에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일설에서는 심한 성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주장도 많다. 헨리 8세에 대해 조금 공부해 보고 내 나름의 추측도 하나 생겼는데, 앤불린을 처형한 사유가 그녀의 불륜때문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새째 부인과 하나뿐인 아들에게 까지 영향을 준게 아닌지 하는 추측이 간다. 세째 부인 제인 시모어는 아들을 낳다 죽었으며 하나뿐인 아들도 병약한 원인이 선천성 질병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모든것의 시발점이 앤불린의 외도와 관계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720() 다시 찾은 런던, 과거와 현재

 

역사 속 영국의 오늘

2003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

 

오늘은 런던 시내를 걸어 다니며 체험하는 가이드투어를 하는 날이다. 아침 9시반에 만난 가이드는 630일 영국 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를 열정적으로 안내하던 분이다. 우리는 런던 시내를 오늘과 22일 이틀에 걸쳐 안내를 받기로 하고 먼저 런던탑으로 향한다. 어제 뉴스에 폭염으로 많은 사람이 숨졌다는 뉴스가 나왔고, 어제 투어 하며 날씨가 더웠으므로 오늘도 매우 더운 시내투어가 될 거라고 예상하고

배낭에 얼린 냉수를 준비하고 적셔서 두르면 목을 시원하게 하는 타올을 준비했다. 그런데 의외로 선선한 가을 날씨처럼 구름 낀 날씨여서 투어에는 딱 좋은 날씨다. 스카이 섬 도착 당일 제법 비가 많이 내려 여행에 약간의 차질이 있던 날을 제외하면 이번 여행에서 날씨는 우리의 여행 일정과 너무 잘 맞아 날씨와의 궁합은 최상인 것 같다.

 

런던탑은 헨리 8세의 제2부인 앤 불린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런던의 어두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성 내부 관람에는 약 두 시간이 소요되며 오디오로 듣는 한국어 가이드도 있지만 우리는 과거에도 몇 번 보았기에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 런던탑 외부 전경. ◀ 런던탑의 사자 우리 모형 ▶ 1998년 비피터와 함께한 사진

타워 브리지를 걸어서 테임즈강을 넘어가면 과거에는 낙후되고 어두웠던 이스트 앤드(East End)’가 시작되는데 런던 올림픽 전후로 많은 정비와 재개발이 이루어져 과거에는 런던탑을 보고 되돌아 번화가로 돌아가던 관광객들이 이스트 앤드의 여러 곳을 방문하게 만드는데, 다리를 건너 바로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 시킨 시청사 건물이 보인다. 그 뒤로 마치 미완성 건물처럼 보이는 유럽 최대 높이의 건물 더 샤드(TheShard)’도 보인다.

 

 

@유리 달걀이라고 불리는 이 시청 건물은 원형으로 기울여 자연적인 그늘이 생기게 만들었고, 태양광 집진 판 설치 등으로 에너지 효율을 크게 향상시켰다.

과거 전성기에는 자주 들어 올렸던 타워 브리지의 다리는 이젠 일 년에 120회 정도 올린다는데 우리가 지나오자마자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상인들의 기숙사로 지어졌다는 건물에는 영국 내 4개국의 통합을 의미하는 조형물이 있는데 모양이 아주 특이하다. 어제 가이드투어 해 주신 분이 버로우 마켓(Borough Market)의 몬모스 커피가 맛있다고 하여 맛보기 위해 들러보니 줄을 길게 서있어 마시기를 포기한다.

 

이 시장은 런던의 식품저장소라 불릴 만큼 종류가 다양한 식품가게가 있는데 우리는 치즈가게에 들러 단맛이 나는 치즈를 약간 사서 점심 먹을 한국인 식당으로 향한다.

@ 사진 1:  몬모스 커피 집에 줄 서 있는 모습 사진 2:  음료수를 파는 가게 .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생활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  사진 3:  치즈 가게 내부 .

 

이병헌이 출연한 영화 포스터 . ( 지하철 역안 )

오랜만에 삼겹살을 굽고 소주 한 병과 와인 한 잔을 시켜 푸짐한 점심 식사를 하니 역시 여행 중에는 이렇게 가끔 한식을 먹어야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2009년 스페인 여행 때 만난 한인 부부는 한 달 동안 한식을 한 번도 안 드셨다던데, 나에게는 힘든 숙제다. 포만감과 행복감으로 다시 길을 걸어 헨리 8세의 사냥터이던 그린 파크(Green Park)로 간다.

 

사냥을 좋아했던 헨리 8세는 43세 때 사냥을 하다 낙마하여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55세에 사망했다. 그린 파크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인기를 얻으려는 찰스 2세 시절 만들어져 공원 내의 산책로에는 웨일즈 공주인 다이에나 추모의 길(The Diana Princess of Wales Memorial Walk)’라는 동판이 보인다.

@에로스 상이 있는 피카딜리 서커스 역에는 대형 광고판이 허용되는 곳인데 1998년 방문 때 찍은 사진에도 삼성은 광고판을 점유하고 있고 산요가 점유하던 자리는 이제 현대에서 점유하고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여왕의 궁전 버킹검 궁전이 나타난다. 궁전 앞에는 여러 동상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있고 그 위로 금박을 입힌 브리타니아의 여신상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민의 존경받는 역대 왕 중에 2위이며 남편인 에버트 공과 결혼하여 남편이 40대에 사망한 후 3년 동안 이 버킹검 궁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고 한다.

@‘브리타니아 여신과 사자’가 있는 조각품이 영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버킹검 궁전의 또 다른 볼거리는 근위병 교대식인데 우리는 시간만 많이 걸리고 그다지 볼 것 없다는 판단하고 오전에 하는 교대식을 아예 보지 않았다. 근위병은 영국 육군 소속이며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을 우선으로 뽑는다. 근위병이 쓰고 있는 털 모자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흰 깃털과 빨간 깃털을 꼽은 자는 잉글랜드, 깃털이 없는 것은 스코틀랜드, 파란 것은 북아일랜드, 하얀색과 녹색이 같이 있는 깃털 모자는 웨일즈 근위병이라고 한다.

 

버킹검 궁전 근처에는 하이드파크의 축소판이라는 세인트 제임스공원이 있는데 이 공원에는 다이애나가 자주 걸어 다녔던 다리가 있다. 우리도 그 다리 위에서 박애주의자였던 다이애나를 생각하며 잠시 쉬어본다.

 

버킹검 궁에서 해군 문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빨간 아스팔트를 깐 ‘The Mall’이라 불리는 도로인데 이곳에는 버스도 들어오지 않으며, 차량도 주정차를 할 수 없고 위반시에는 왕실 모독죄로 250파운드의 벌금을 내야한다. 다시 길을 가니 도로 가운데 ‘1, 2차 대전의 여자들이라는 기념비가 30여 미터 간격

으로 있다. 엘리자베스 2세 현 여왕도 공주 시절인 194518세 때 군용 트럭을 모는 운전수로 복무하며,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일했다고 한다.

 

◀ 붉은 카페트를 깐 느낌을 주기 위한 The Mall 도로 ▶ 2차 대전에 참전한 여성을 기리는 기념비

여왕을 호위하는 기마병 부대 앞에는 보초 서는 여군이 졸리거나 피곤하면 절도 있는 동작을 하면서 움직이며 보초를 서고 있다가 다시 한 자리를 지키며 보초를 서고 있다. 아내가 그때를 노려 같이 사진을 찍는데 미동도 않지만 자기는 이렇게 더운 날 보초 서고 있는데, 관광객이 사진 찍으니 좀 불편해 하는 느낌인 것 같다.

 

웨스트 민스트 사원으로 가는 길에 빨간 전화통이 여러 개 보인다. 디자인의 도시라 불리는 런던은 안개 끼고 쌀쌀한 날씨의 이미지를 벗고자 과감히 빨간 색을 선택하여 전화통이나 버스의 색으로 선택하였고, 이 생각은 적중하여 이제는 첨단 디자인의 선두주자로 런던이 뛰고 있다.

 

@오늘 본 전화통과 윈저성 앞에 있던 전화통

웨스트 민스트 사원 앞에 와서 잔디에 앉아 설명을 듣는다. ‘서쪽의 아름다운 사원이라는 의미의 이 사원은 영국 왕들이 대관식을 하는 장소로도 유명하며, 평민 출신 유명인들도 이곳에 많이 묻혀있다. 건물은 짓기 시작하여 243년간 지어졌기에 왼쪽은 정통 고딕 방식으로 지어졌고, 오른쪽은 날렵한 형태의 고딕 방식으로 지어져 묘한 대비를 이룬다.

 

@건물의 길이가 길어 한 화면에 다 담기 위해서는 길 건너로 가야한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국회의사당과 그 옆의 빅벤이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공포 정치를 실현했던 크롬웰의 동상이 있다. 폭정으로 인기가 없는 정치인이지만, 국왕 찰스 1세와의 내전에서 국회군을 이끌고 결국 찰스 1세를 물리치게 되어 이 동상이 국회 앞에 있다.

 

빅벤은 98미터의 높이로 아래편에는 문서저장고가 있다. 15분마다 종을 치는 이 빅벤이라는 이름은 건설 당시 공사 감독이던 큰 몸집의 벤저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하며 향후 엘리자베스 2세 타워로 이름을 바꾸기로 국회에서 의결 되었다. 아마 여왕이 은퇴하거나 사망하면 그렇게 부르게 될 것 같다.

 

오늘 하루도 많이 걸어 다녀 무척 피곤하지만 알찬 시내 관광을 한 것 같다.

 

722(), 런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역사 속 영국의 오늘

1972년 유럽 자유무역권 형성

 

아침에 일어나니 비와 함께 천둥 번개가 친다. 런던 시내투어 2일차 하는 날이어서 비 맞을 생각에 걱정하고 있는데 숙소를 나설 즈음 비가 그친다.

 

첫 투어 장소는 넬슨의 동상이 있는 트라팔가르 광장이다. 넬슨의 일대기에 대한 설명을 듣는데, 내가 미리 공부를 좀 한 덕분에 가이드의 설명이 쉽게 인식이 된다. 넬슨 동상 아래에는 영국의 상징인 사자가 네 마리 있는데 해전 당시 나포한 프랑스군의 대포를 녹여 만들었다. 트라팔가르에서 전사한 넬슨의 시신은 방부 처리를 위해 술통에 넣어 보관하여 본국으로 이송되었고, 장례 전에는 그리니치 지역에서 사흘 머물다 영국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인 세인트 폴 성당에 안치되었다.

넬슨 동상과 내셔널 갤러리 사이에 조각상을 얹어놓는 빈 좌대가 보여 왜 비워뒀는지 궁금했는데, 해마다 전시하는 조각이 바뀐다고 한다. 곧 다른 조각상이 올려질 예정이라는데 2011년에 이곳에서 전시된 병 속의 함선을 그리니치에서 볼 수 있었다.

@ 우리가 귀국하고 이틀 후 런던 시내 가이드 해주셨던 분이 메일을 보내왔는데 ,  빈 좌대 위에 파란 닭이 올려 졌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  고맙습니다 !

다음 행선지는 그리니치 천문대이다. 런던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지역이어서 실제로는 1~2구역을 많이 벗어난 지역이지만 행정구역 상 2구역으로 하여 런던 관광 시 보통의 관광객이 사용하는 오이스트 1~2카드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였는데 실제 지하철로 가다 다시 경전철로 갈아타야 하는 다소 먼 곳이다. 천문대는 낮은 능선 위에 있어 약간의 등산이 필요하지만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 배운 곳이어서 그런지,마음의 고향 같은 느낌이어서 가뿐하게 올라간다.

 

지금은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는 것 같은 마음의 많은 관광객들이 천문대 내에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길이의 단위인 피트인치의 표준 척도와 24시간을 표시하는 시계가 있어 그 앞에서 방문 인증용 증명사진 한 장을 찍어본다.

천문대 건물 위에 빨간 풍선이 하나 보여 그 기능을 물어보니 정각 한 시가 되면 위로 올라가는데, 이는 시계가 드문 과거에 항해하는 선박들이 이 풍선을 올라온 것을 보고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천문대 내부 구역에는 자오선을 그은 선과 실내에 천문 관측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어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볼 가치도 적어 우리는 다음지역으로 이동하려 하는데 기념품점에 들른 아내가 실수로 천문대 내부 구역으로 입장해 밖에서는 보이지만 촬영이 쉽지 않은 바닥의 자오선 사진을 찍어왔다. 선의 양쪽으로 발을 걸치면 동양과 서양을 같이 밟고 있는 게 된다!

그리니치에는 프라센티아궁이 있었는데 헨리 8세와 메리여왕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곳에서 테임즈강을 바라보며 그녀의 대양에 대한 꿈을 키워왔고 실제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맞서기 위해 해적 드레이크를 자국의 해군 장교로 임명하여 스페인을 무찌르기로 했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로맨스는 많이 있었고, 약혼 후 실리를 챙기고 파혼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녀는 영어를 체계화한 왕이기도 한데, 그 당시 표현이 어려운 단어들은 불어로 사용되던 것을 셰익스피어와 같은 작가들을 적극 후원하여 오늘날의 영어 체계를 만들었다. 영국 속담에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안 바꾼다.’라는 오만한 말도 이때 생겨나게되었다.

 

@ 오늘이 그리니치 대학교 졸업식 날이다 !

시내로 돌아가는 테임즈강 유람선을 타기 전 부두에 설치된 커티삭 호를 잠시 구경한다. 커티(Cutty)는 짧은, (Sark)은 속옷(pettcoat)이라는 뜻이다. 유래는 스코틀랜드의 국민 시인인 로버트 번스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매혹적인 속옷 차림을 한 마녀가 번개가 치는 날 밤에 말을 타고 달리는 농부를 쫓다 말의 꼬리만 잡고 농부를 놓치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 배는 증기선의 등장으로 범선이 쇠퇴할 무렵의 마지막 범선으로, 증기선은 석탄을 연료로 하여 연료의 부족으로 항해 거리의 제한이 있지만 이 범선은 바람을 이용하기 때문에 장거리 운송이 가능해서 인기가 많았다.

사진 1:  커티삭 호의 앞부분 .  사진 2:  마녀가 말꼬리만 쥔 부위를 확대한 사진 .  사진 3:  배 앞부분을 장식한 화려한 조각 .

유람선을 타고 가는 테임즈강 양쪽 강변에는 예전 부두 노동자들이 사용한 숙소였던 프랏(Flat)’들이 많이 보인다. 마치 한강변에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선 모습과 비슷하다. 갑자기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내용을 들어보니 다른 유람선이 기관 고장으로 우리 유람선에 사람들을 옮긴다고 양해를 구한다는 안내 방송이다. 잠시 후 강 위에 떠있는 유람선 하나가 보이더니 양 유람선을 근접시켜 사람들을 옮기는데 첨 있는 경험이다.

 

런던탑 부근 선착장에서 내려 우리는 영국 시민들의 마음의 고향인 세인트 폴성당으로 이동한다. 가는 도중에 런던에 와서 처음으로 말을 탄 경찰을 본다. 길 보수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말하는데, 현장 정리를 잘하고 작업하라는 것 같다.

◀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길거리 행위예술가 ‘얼굴 없는 사람(런던, 에든버러, 그래스고 등 지에서 골고루 봤다.)’▲  버스의 관광객들도 기마경찰을 신기해하며 보고 있다 .

이 성당(입장료 성인 16파운드)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도 있지만 든든하게 라이브로 전해 주는 가이드가 있기에 오디오 가이드는 생략하고 지하 1층의 위인들의 무덤을 본다. 넬슨과 웰링턴의 무덤이 중앙의 가장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있고 넬슨의 석관은 큰 추기경 모자가 관 위에 씌워져 있다. 웰링턴의 석관 네 귀퉁이에는 사자가 지키고있다. 625동란의 전사자 일부도 이곳 성당에 묻혀 있다고 한다.

 

지하 1층의 다른 한 쪽에서는 이 성당의 역사에 대한 시청각 자료를 상영하고 있다. 수학자 출신 랜이 설계하고 건축한 이 성당의 돔은 경제적인 이유로 랜의 설계가 2번 기각되기도 했으며 예산 절감을 위해 내부 돔을 약식으로 마무리하고 나중에 외부에서 보이는 웅장한 돔으로 변경하여 마무리하였다.

 

1666년 런던의 한 제과점에 불이 런던 시내 전체로 번진 대화재로 이 성당도 불타 재건하였다. 2차 대전 때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경계 근무를 하여 공습 후 화재 및 사고 수습을 신속히 하여 성당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가이드와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본다. 가이드도 이곳에 몇번 왔지만 여러 이유로 못 올라가 봤는데 오늘에야 올라가 본단다. 좀 늦은 시간이었는데 운 좋게도 우리가 마지막 옥상 입장객이다. 돔이 시작되는 지점은 ‘Whispering Gallery’라고 불리는데 소리가 울려서 그렇게 불리는 것 같고, 가짜 돔의 첫 부분은 ‘Stone Gallery’, 나중에 건설한 진짜 돔의 옥상은 ‘Golden Gallery’로 불린다.

 

이곳 옥상(Stone Gallery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런던 시내의 전경은 런던아이에서 보는 전경과 함께 런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대표적 장소여서 환영받고 있다. 특히 이곳은 기계 위가 아닌 런던의 마음의 고향 위여서 보는 전경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한다(오늘 런던아이도 탑승해보니 런던아이는 볼 수 있는 시야가 한정되어 있어 런던탑 주변이 멋지게 보이는데 여기서는 사방이 다 터져있어 더 멋지다. 시원한 자연 바람까지 불어와 더 좋았다).

 

▲ 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 ‘더 샤드’가 한눈에 보인다. 그 왼편 건물은 오이를 닮았다 해서 별명인 ‘거킨(The Gherkin Building)’빌딩이다. ▼ 세인트 폴과 테이트 모던을 잇는 밀레니엄 브리지가 보인다. @런던아이가 멀리 보인다. 이 사진으로 봐도 런던아이에서 볼 수 있는 런던의 전경은 한계가 있다.

세인트 폴 성당과 테이트 모던을 이어주는 밀레니엄 브리지는 런던의 제2도약을 위한 상징이기도 하다. 2011년 영국 올림픽 대표단이 이 다리에서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상위 성적을 기대하는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는 의미의 이 다리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상징으로 처음 개통되었을 때는 다리가 흔들거려 축하행사에 나온 여왕이 다리를 못 건너는 해프닝도 있었다. 지금은 흔들거리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안전하게 연결하며 매시간 오천명의 관광객이 건너고 있다.

@주변 건물의 조각들

런던아이가 설치된 람세스지구는 런던의 33개 지구 중 가장 열악한 지역이었는데 이 시설 덕분에 순위가 많이 올라갔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 보는 런던의 야경은 무척 아름답다고 하는데 야경을 보려면 해가 지는 10시 이후에나 가능한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그때는 운영을 안 하는 것으로 안다.

30분을 줄서고 기다려 탑승 시간은 약 20여분인데 각 케이지에는 16명 정도 탑승한다(성인 18파운드). 내리는 손님이 내린 후 보안 요원 두 명이 안전을 확인하는 탐지기로 내부를 신속히 점검한 후 승객을 태운다.

내부에는 반갑게도 삼성의 갤럭시 탭 10.16대 설치되어 런던아이에서 바라보는 각 지점의 건물에 대한 안내가 되어있다. 공중에서 이동하며 런던의 경치를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있으며 탑승한 다른 사람들도 마음이 들떠서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가족이나 연인과 계속 사진을 찍는다. 내리기 일분쯤 전에는 내부 바닥에 쓰여진 두 군데의 포토존중 한 군데 서 있으면 밖에서 조명과 함께 사진을 찍는데 내려서 모니터로 자신들의 사진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 사진은 맘에 안 들어 패스!

 

런던아이를 보기 위해선 지하철 워털루역에 내렸지만, 돌아가는 길은 빅벤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하며 웨스트 민스트 다리 위의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걸어간다. 하늘에는 노을이 옅게 물들고 있고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다리 위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감상에 젖어 즐거워하고 있다. 다리를 지나서 웨스트 민스트역에서 탑승한다. 오늘도 많이 걸었지만 매우 알찬 하루가 되었다.

 

아래는 내가 사전 조사한 내용으로 넬슨과 트라팔가르 해전을 객관적으로 바라 본 자료이다.

넬슨제독과 트라팔가르 해전

1. 넬슨의 출생 및 성장

 

@ 비비안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했던 영화  ‘ 미녀 엠마 ’ 에서 넬슨과 엠마 .  이 영화에 함께 출연하여 둘은 사랑에 빠져  20 년간 부부로 살았다 .

넬슨은 1758929일 영국 잉글랜드 북부 노퍽(Norfork) 번햄소프(Bumham Thorpe)에서 탄생, 불과 열두 살 해군에 입대할 때까지 성직자 집안에서 성장했다. 영국 해군 대령이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1771년 해군에 입대하였고 그는 스무 살 때 영국 프리깃함 함장에 기용됨으로써 영국 해군사상 최연소 함장 기록을 세웠다. 그는10년간 대부분 서인도 제도에서 근무했다.

 

1780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였고 1782년 프리깃함 HMS 보레아스(Boreas)의 함장이 되었고 카리브 해에서 영국 상선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792년 마침내 넬슨은 전함 아가멤논(Agamemnon)을 이끌고 프랑스 혁명전쟁에 종군하여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싸웠다. 그는 1794년 코르시카의 칼비 지역을 겨냥한 상륙작전을 지휘하다 처음 부상했다. 넬슨은 프랑스 혁명군이 대포를 쏘아 떨어뜨린 모래와 돌에 오른쪽 눈을 맞았다. 넬슨은 이때 부상으로 오른쪽 눈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1797년의 세인트 빈센트 해전에서도 수훈을 세웠으나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프랑스 함대와 대결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1798년 나일강 입구의 아부키르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여 나일강의 남작이라 불렸다.

 

1793년 나폴레옹이 지배하는 프랑스와 전쟁이 발발하자 넬슨은 지중해 함대로 전근됐다. 그는 그곳에서 10여년 간 나폴레옹 군과 싸우면서 더욱 높아진 자신의 명성을 다시 국민적 영웅자리로 끌어올렸다.

 

2. 엠마와의 사랑

 

엠마의 본명은 애미 라이언이고 가난한 집안의 홀어머니 밑에서 곤궁한 삶을 산다. 15세에 단역 배우를 하다 해리경이라는 귀족 집에서 일하던 중 그레빌이라는 16세 연상의 귀족을 만나 그의 정부가 되며 이름을 엠마 하트(Emma Hart)로 바꾼다. 1786년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던 그레빌은 21세의 엠마를 나폴리 공사로 있던 친척 홀아비 아저씨인 50대 중반의 윌리엄 해밀턴에게 보낸다. 엠마의 타고난 사교술에 빠진 해밀턴 경은 1791년 엠마와 결혼을 한다.

 

지중해 함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넬슨은 아부키르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1798년 나폴리에 입항했는데(40) 영국의 나폴리 파견공사인 윌리엄 해밀턴(67)의 부인 엠마 해밀턴(33)을 만나 엠마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다. 넬슨은 부인이 있었지만해밀턴 부인과의 관계는 일생동안 계속된다. 바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던 넬슨은 엠마에게 푹 빠져 나폴리에서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벌이지만 해밀턴 경은 모른 체한다. 그러다 해밀턴 경과 넬슨은 본국의 소환으로 영국으로 돌아가는데 엠마와의 사이에 딸 호레시오 넬슨을 낳는다. 180011월에 영국에 도착한 넬슨은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는다.

 

아내 파니 넬슨(Fanny Nelson)과 이별을 하고 해밀턴 경의 집에서 엠마와 셋이 같이 살게 되고 영국 최고의 영웅이 이상한 삶을 사는 것이 불편했던 영국 상류 사회는 결국 넬슨을 다시 바다로 보내어 덴마크 침공 작전에 투입한다. 18044월 해밀턴 경이 노환으로 사망하고, 넬슨은 당당히 엠마와 가정을 꾸민다.

 

3. 프랑스 제독 피에르 드 빌뇌브

트라팔가르 해전 25년 전에는 프랑스 해군이 영국의 해군만큼 강했다. 미국의 독립 전쟁을 위해 영국 해군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육군이 더 중요시되고 자코뱅당의 공포정치로 장교의 3/4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해외로 추방되었으며 5000명의 해군 포병 대원들이 바다의 귀족이란 이유로 해산당하며 쇠퇴의 길을 걷는다.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은 드니스 데크레는 해군 장관이 되면서 그의 친구 피에르 드 빌뇌브를 해군 사령관에 임명한다. 빌뇌브는 공포정치의 영향으로 귀족 출신인 자기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비관적 현실주의자였는데 넬슨과 나일강 전투에서 넬슨이 침투가 어려운 해안 쪽으로 우회하여 자신들의 함선 앞뒤로 공격하여 크게 참패한 경험이 있다.

 

1804년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위해 프랑스 해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1400척의 바지선과 14만 대군을 준비시키고 빌뇌브에게 프랑스 육군이 바다를 건널 24시간 동안 영국 해군을 물리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빌뇌브는 프랑스함대를 여러 번 영국 쪽으로 이동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폭풍우와 영국 함대의 저지로 좌절되었고 비관주의적인 그의 성격으로 심장병이 악화되었다. 실망한 나폴레옹은 해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명령을 내린다. 부함장인 조질리를 함장으로 하고 빌뇌브는 파리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으로 빌뇌브는 그의 신중함이 분노로 바뀌어 1019일 카디스 항에 있던 함대를 이동시켜 21일 트라팔가르에 도착한다.

 

이 전투에서 빌뇌브는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고 이듬해인 1806년 석방되지만 자살한다(가슴에 칼이 여섯 번 찔린 채 발견되는데 자살인지 나폴레옹에 의해 제거되었는지 알 수 없다).

 

4. 트라팔가르 해전

영국 해군은 1793년부터 바럼 경이 해군 개혁을 추진한다. 범선의 아래 부분에 조개가 달라붙어 배를 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리를 입혀 배의 항속을 높이는 등의 개혁적인 조치를 취해 해군력을 끌어올린다. 넬슨은 트라팔가르 전쟁에서 대승하여 다시 한 번 과거의 영광을 누리려고 다짐을 하고 이 해전에 임한다. 이번 전투에서 넬슨의 전법은 ‘Nelson touch’라는 전법으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처럼 일열 종대로 벌여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진영 중앙을 2열종대로 정면 관통하는 작전이다(넬슨은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전술에 대해서도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18051021.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 27척은 스페인 남서쪽 끝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에서 33척의 프랑스 - 스페인 연합 함대를 만난다. 선두의 빅토리 호에 탄 넬슨은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는 신호를 각 배에 보내며 해전의 시작을 알린다(넬슨 동상의 바닥에도 새겨진 이 문구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즈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배의 화력이 월등히 앞선 영국군은 개전 시작부터 연합군을 초토화 해 나가고, 넬슨의 빅토리호도 상대편 르두터블 호에 무자비한 포격을 감행한다. 넬슨은 전투에 임할 때 항상 정복에 여러 훈장을 달고 나서서 적의 저격병에게 쉽게 노출되곤 했는데, 이번에는 저격병의 총탄이 왼쪽 어깨를 뚫고 들어가 척추를 부수고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넬슨의 빅토리 호 바로 뒤에는 하비 함장이 탄 테메레르함이 붙어서 싸웠는데, 이 해전에서 넬슨의 사후 가장 큰 전과를 올린다. 넬슨의 유언으로 잘 알려진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신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나의 임무를 다했습니다.)’외에 넬슨은 내 여자 엠마에게 충분한 연금을 보장해다오

는 유언도 남겼는데 전후 넬슨의 공적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논공 행상으로 두둑한 포상을 받았지만 엠마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넬슨의 봉급과 연금도 끊겨 궁핍하게 살다가 프랑스 칼레에서 병사를 하고 그 딸 호레시오는 넬슨의 누나들이 잘 키웠다고 한다.

 

해군이 전사하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수장하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특별한 넬슨의 시신은 영국으로 보내졌고, 성바울 대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세인트 폴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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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전 의 생생한 상황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은 ‘ d a u m ’ 에 서 약 간 의 노력을 하면 전쟁에 대해

해 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의 자세한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4대 해전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것은 없다. 나라에 따라서 자신들의 편의와 국익을 위해 자신들의 나라 해전을 4대 해전에 넣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터넷에서 떠도는 대표적인 4대 해전은 아래와 같다.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大捷), 1597년의 명량해전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르(Trapalgar) 해전

 

우리나라의 한산대첩과 명량해전이 서로 4대 해전으로 각축을 벌이는 이유는 한산 대첩은 학익진 전술로 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고, 명량대첩은 원균이 일본에 참패 후 남은 13척의 배로 10배 이상인 133척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전과를 올린 전술의 승리인 해전이어서이다.

 

@인터넷에는 이순신 장군과 넬슨 중 누가 더 위대하냐는 글이 있는데 제 생각에는 당연히 이순신 장군입니다. 넬슨처럼 국가적 해군력의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닌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의 힘으로 해군력을 키워 솔선수범하며 이룬 그의 전공은 아무도 쫓아올 수 없는 진정한 영웅입니다.

 

일본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1907년 러시아 발틱 함대와 싸워 이김으로써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발틱 함대는 러시아 3대 함대에 속할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겁니다.

그러니까 섬나라에 불과한 일본의 연합함대가 여러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러시아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승리의 주역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주위에서 그를 이순신과 같은 위인이라고 칭송하자, 이에 나의 공로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순신 제독의 업적에는 따라갈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721일은 휴식과 뮤지컬 공연 관람, 쇼핑을 하였는데 글 올리는 건 생략합니다

 

723(), 영국을 빛낸 두 영웅을 찾아서

 

역사 속 영국의 오늘

1916년 영국의 화학자 램지 사망

(네온, 아르곤, 크립톤, 크세논 등 4가지 비활성 기체를 발견)

 

오늘 갈 곳은 셰익스피어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이번강 위의 스트랫포드라는 의미로 영국에는 스트랫퍼드라는 지명이 많다.)’과 처칠의 생가이자 무덤이 있는 브랜하임 궁(Blenheim Palace)이다. 오래전 과거와 근대의 영국을 빛낸 두 위인의 자취를 탐방하는 이 투어의 단체투어를 예약했지만 신청자가 없어 우리 가족만 다니게 된다.

 

런던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가는 도중 천둥 번개와 함께 장맛비 같은 폭우가 쏟아진다. 차들이 물 위를 미끄러져 가며 뒤로 흰 물보라를 뿜어내는데 마치 물위를 달리는 기분이 들며 무섭다. 30분 정도 내리더니 그치는데, 이런 급격한 날씨의 변화는 최근의 이상 기후와 지구 온난화 등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셰익스피어 생가 입장료는 15파운드인데 한 장의 표로 4군데를 갈 수 있다. 1생가, 2손녀 엘리자베스 홀과 법조인 사위 나쉬의 집 및 셰익스피어가 1597년 구입하여 살다가 1616년 임종을 맞은 집(Nash’s House & New Place), 3사위 존 홀의 집인 홀스 크로프트(Hall’s Croft - 셰익스피어의 장녀 수잔나와 의사인 사위집), 4묻혔던 교회(Holy Trinity)까지 입장할 수 있으며 각 장소마다 내부에 한글 안내서가 있어 아주 맘에 든다. 표의 유효 기간이 1년이어서 우리는 표를 가이드에게 넘겨주고 다음에 올 한국 관광객들에게 드리라고 했다.

 

@생가의 전면은 현대식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와 뜰은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생가의 아버지가 가죽 다듬던 장소에서 설명하는 직원과 인턴 여직원 ▼ 뒤뜰에서 공연하는 여자 주인공과 함께@4대 비극의 하나일까? 여자는 남자에게 불평을 한다.

아버지가 이 지역에서 가죽을 다루는 일을 하는 부자여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셰익스피어는 연극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런던에 진출하지만 빛을 보지 못한다. 대신 그가 쓴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극 대본이 히트를 치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다양한 소설로 표준 영어를 보급하여 당시 불어에 밀려있던 아름다운 영어의 표현을 발굴하고 사용해 현대 영어의 기초를 다졌다.

 

생가 내부에서는 아버지가 하던 가죽 다듬는 일을 보여주며 설명하기도 하고 외부 정원에서는 배우들이 셰익스피어의 소설로 극화된 내용을 연기하기도 한다.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이곳에 그의 초상화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한 번도 안 가본 베니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데 그가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설도 있어 더욱 궁금하다.

 

@사진 1, 2: 셰익스피어의 10대 작품 2위의 햄릿과 8위의 맥베스.(1위는 로미오와 주리엣) 사진 3, 4: 1500년대 복식을 소개한 그림과 아이들이 색칠하며 배우는 공간

 

@사위와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집

 

▲ 막 결혼식을 끝낸 나이가 든 신랑, 신부. “축하해!”하니 고맙다고 한다.

 

▼  튜더왕조 풍의 건물 벽들 .

 

▲  교회 내 셰익스피어의 무덤이 표시된 곳 .

 

▼ 에이번강의 낭만적인 풍경

교회에 있던 그의 소박한 무덤까지 본 후 우리는 에이번 강가를 거닐며 백조와 보트의 여유로움을 느끼다 늦은 점심으로 이태리 식당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먹는데 맛이 좋다. 이번 여행에서 맛집을 많이 다닌 덕에 체중도 좀 불었는데 들어가서 열심히 운동해야겠다.

 

블렌하임 궁전은 블렌하임 전투(Battle of Blenheim)에서 큰 공을 세운 말보로 공작(Duke of Marborough) 존 처질에게 왕이 영지를 하사하여 이곳에 건립되었는데 부지가 꽤 넓다. 1704813일 일어난 이 전투는 지금은 독일 영토인 도나우 강가 블렌하임에서 벌어졌는데 존 처칠은 프랑스군을 대패시키며 적장도 생포한다. 입장료가 인당 22파운드로 비싼 편인데, 이곳도 1년 동안 방문이 가능한 곳이지만 증명 카드를 발급받아야 한다. 무료이기에 간단한 절차로 사진을 찍고 발급받으니 안의 선물용품점과 카페도 15%할인이 된다.

 

@사진1: 처칠가의 문장, 사진2 : 궁전 전경, 사진3: 1년 출입증@9, 10대 공작들이 주요 행사 때나 성 내부에서 입었던 옷▶  사이렌 슈트 ( 방공복 ) 로 제 2 차 세계대전 때 처칠 수상이 착용했던 상하가 이어진 슈트 .  그의 예쁜 아내가 해준 옷이다 .

내부의 각 주요 방은 담당자들이 배치되어 설명을 해주는데, 관광객이 너무 많아 통로를 다니기 힘들 정도이며 특히 중국인 학생 관광객이 많다.윈스턴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1874~1965)은 그 명성만큼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팔삭둥이로 태어났고 성장기에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일부 과목은 낙제도 받았으며 명문대에 못 가 3수를 하고 육사에 입학했다. 후일 옥스퍼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30분이 주어진 그의 연설 시간에 그가 한 연설은 “Never giveup! Never, Never, Never give-up!” 말이 다였다. 그가 하원의원에 처음 출마했을때 상대 후보가 늦잠 자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비난하자 아마도 나처럼 예쁜 마누라를 데리고 산다면 당신도 일찍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총리가 된 뒤 의회 출석이 늦었던 처칠은 앞으로 의회 출석할 때는 각방을 사용하겠다고 했단다.

 

인터넷에는 그의 많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고 일부는 과장된 면도 있지만 그의 여유로운 마음과 열정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  2 차 세계대전에 임하며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명연설

나는 피와 땀과 눈물 밖에 바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정책이 뭐라고 묻습니

. 그것은 가공할 폭정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목적이 뭐냐고 묻습니다. 저는

한 마디로 말해 승리라고 말하겠습니다. 어떤 희생, 어떤 공포에도 불구하고 승리입니다. 갈 길이

아무리 길고 험해도 승리해야하며 승리 없이는 생존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원에는 축구장 몇 개 정도를 합친 정도의 큰 잔디밭이 있는데 큰아들은 이런데서 골프 라운딩하면 OB도 없고 좋겠다고 한다.

오늘 가이드를 해 주신 분은 영국에서 20년 가까이 생활하신 분으로 시민권을 받았는데 영국의 생활에 대해 잘 설명해 주신다. 학교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무상이었던 영국은 2003년 대학 등록금을 년간 40만원 정도 받기로 하여 당시 사회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가볍게 넘어갔는데, 해마다 조금씩 인상되어 작년 9월 입학하는 신입생의 경우 년 1700만원의 학비를 내야 했기에 큰 소동이 벌어졌고 정부는 무이자 융자 등의 조치와 취직 후 일정 연봉 이상 수령 시 장기 환불하도록 정책을 수정했다고 한다.

 

보수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 보장 제도는 더욱 손질을 가하는 중이며 이민자 정책도 제한이 강화되어 시민권 발급 절차도 더욱 힘들게 되고 있다. 백인들의 출산율은 급격히 저하되는 반면 산아 제한이 없는 종교의 중도인계는 계속 인구가 늘어나이 추세라면 100년 후의 영국은 회교도 국가로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난 25년간 영국 성공회 교회는 350개가 줄었지만 회교사원인 모스크1000개가 넘으며 계속증가 추세에 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요즘 동유럽계의 이민을 적극 받아들이는데 일부 사회에 부적응하는 이민자들의 불법으로 치안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한다.

 

IMF위기를 넘겼던 철의 여인 대처는 강력한 노조 정책으로 30년 파업을 종결 시켰고, 긴축 정책으로 경제가 좋아지긴 했지만 많은 국민들은 그녀의 재임기간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특히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완화 부탁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력한 정책으로 여왕과의 관계가 매우 소원해졌다. 말년의 대처는 치매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여왕이 방문하자 아줌마는 누구세요?’라고 물어 연민을 느낀 여왕은 대처의 손을 잡고 화해했다고 한다. 대처는 국민들 사이에 호불호가 분명하게 가려지는 인물로 그녀의 장례식에서 한쪽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환호하고 다른 한쪽은 슬픈 눈물을 흘렸다는 뉴스를 한국에서도 본 적이 있다.

 

과거 해가지지 않는 나라에서 IMF구제 금융을 세 번이나 받은 나라로 된 이유가 뭘까? 영국 여행 가기 전 들었던 영국사 강의에서는 한때 너무 잘되어 가고 있어서 변화의 시기를 놓친 것이 중요 원인의 하나라고 했다. 교육의 경우 20세기까지 국가가 아닌 교회에서 담당했으며 많은 문제들을 국가가 간섭을 안 했다. 그리고 영국의 팽창은 자기 능력보다 과대 팽창이 되어서 구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윈스턴 처칠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영국의 또 하나의 영웅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섀클턴 경(Sir Ernest Shackleton, 1874~1922)에 대해 알아본다. 몇 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한 강의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1900년대 초반은 열강들이 해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190946일 미국의 탐험가이자 군인인 피어리는 최초로 북극점을 밟는다. 남극점을 세계 최초로 정복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과 영국의 해군 탐험가 스콧은 비슷한 시기에 남극점 정복의 도전에 나서서 아문센이 먼저 남극점에 노르웨이 깃발을 꼽고(1911129) 귀환을 하게 된다. 스콧은 그보다 한달 뒤 남극점에 도달하였으나 아문센이 먼저 정복한 것을 알게 되고 귀환도중 사망한다.

이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영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탐험가 섀클턴은 남극 대륙을 세계 최초로 걸어서 횡단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선원과 투자자를 모집한다. 이 목표는 하루에 평균 24Km를 걸어 100일 안에 2400Km의 남극 횡단을 의미한다.

 

191411일 신문 공고를 낸다. ‘대단히 위험한 탐험에 동참할 사람을 구함. 급여는 쥐꼬리만 함. 혹독한 추위와 암흑과 같은 세계에서 여러 달을 보내야 하며, 탐험기간 동안 위험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며, 무사히 귀환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음

 

27명 모집에 5000명이 응모하였고 섀클튼은 응모자 중 모험심이 강한 27명을 뽑는다. 그 시대 가장 강력하다는 목선 Endurance(길이 44미터의 300톤 규모 목선)를 인수하여 191481일 세계 최초의 남극횡단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출항한다. 출항 3일 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탐험 중단의 위기가 발생했지만 당시 해군성 장관이던 처칠은 계속 항해를 허락한다(처칠과 섀클턴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남대서양 사우스조지아 섬까지 순항하여 115일 섬의 포경기지에 도착한다.

 

125일 남극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118일 얼음 바다에 갇혀버린다(쵸코바에 박힌 아몬드처럼). 당초 계획은 크리스마스부터 행군할 예정이었다. 얼음 바다에 갇혀 낮에도 해가 없는 남극바다에서 9개월간 지내다가 19151027일 서서히 다가오던 대형 유빙에 의해 배가 붕괴되어 배를 버리고 탈출한다. 이제는 남극 대륙 횡단이 목표가 아니라 28명 전 대원의 무사귀환이 목표다.

개인 짐은 1Kg으로 제한하여 행군을 시작한다. 배에서 기르던 애견 시리우스는 썰매개가 아니라는 이유로 주인에게 총살당하고 탐험대 마스코트였던 고양이도 총살당한다. 사진사는 400여 통의 기록 필름을 포기한다. 비상 보트 세 척을 가지고 이동하는데 하루에 1Km도 못 가게 되어 총 14Km를 행군하다 19151223일 남극 바다 위의 부빙위에 캠프를 설치하고 이듬해 191646일까지 지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섀클턴 일행은 썰매 개와 남극의 펭귄으로 식량을 해결한다. 질 좋은 스리핑 백은 18개이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만든 동물 가죽의 스리핑 백이었는데, 섀클턴은 추첨을 조작하여 일반 대원들이 고급 스리핑 백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이들 28명이 문명세계와 고립된 채 400일이 경과하여 돌아가기를 소망하던 영국 본토에선 제1차 세계대전이 3년째로 접어들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큰 기대를 받으며 남극으로 향한 이들 28명에게 자격도 없는 탐험 대장과 대원이라는 비방이 난무한다.

 

부빙 위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1916년 눈앞에 펭귄 오물로 뒤덮인 30미터 X 15미터 크기의 코끼리 섬을 발견하고 세 척의 보트를 띄워 48시간 동안 쉼 없이 거친 파도를 헤쳐 1916413일 섬에 상륙한다. 실로 16개월 만에 밟는 땅이다. 섀클턴은 5명의 불만투성이에 명령 불복종의 골치 덩어리 대원들을 데리고(섬에 남겨진 부대장의 지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 코끼리 섬에서 약 1300Km 떨어진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구조 요청을 하러 비상 보트를 타고 험한 항해를 다시 시작하며 남겨진 대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살아남아라, 한 달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탈출하라(1916424)”

 

20미터의 파도와 시속 100Km에 육박하는 강풍을 헤쳐 나가는 6인을 태운 작은 보트는 사우스조지아 섬의 포경 기지가 있는 곳의 반대편에 도착을 한다(1916510). 섀클턴은 세 명의 대원을 이곳에 남겨 두고 해발 3000M의 얼음산을 넘어 마침내 스트롬니스 포경기지에 도착하여 구조선을 각국에 요청하지만 본국인 영국조차 구조선을 안 보내 주는데 칠레 정부에서 배를 제공받아 3차례의 구조 접근 시도 끝에 마침내 830일 전 대원을 구조한다. 1916830일 조난 634일 만에 28명의 전 대원이 무사 귀환한다.

계획한 남극 대륙 횡단은 실패했지만 그것은 탐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가 되었다. 섀클턴은 실패를 두려워 마라! 살아있는 한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Survival Leadership을 보여주며 세계 역사상 위대한 탐험가 5위로 평가되고 있다(6위가 아문센).

 

귀환 후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고 가정에는 금이 가고 연인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다 네 번째 남극 탐험에 나서지만 항해 도중 심장마비로 마흔 여덟 번째 생일을 41일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난다

 

724(), 영광의 옥스퍼드, 아름다운 코츠월드

 

역사 속 영국의 오늘

1974년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 사망(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1837년 영국 런던에서 전신 메시지 성공

 

며칠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영국 탐험 한 달이 지나 오늘이 마지막 투어일이다. 옥스퍼드 대학가와 영국인들이 은퇴 후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 코츠월드를 가는 날인데 가이드는 며칠 전 바스 갈 때 담당했던 예쁘고 열정적인 분이다.

 

소가 강을 건넌다는 의미인 옥스퍼드는 런던에서 기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어 런던에서 통학이 가능하며, 25천명의 학생 중 70%가 백인이고 그 다음이 인도인이며 최근 중국 학생도 많이 증가하고 있고 한국인 학생은 50명 정도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는 다르게 옥스퍼드 대학교란 이 지역 38개 대학의 연합체를 말하는 것으로 특정 대학교의 이름이 아니다. , 옥스퍼드에서 대학을 나왔다 하면 그 안의 38개 대학 중 무슨 대학을 나왔다는 뜻으로 각 대학은 모두 3년제의 학교이고 1년에 3학기 수업을 하는데, 한국과 미국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곳 학생들이 시험기간에는 꽃을 가슴에 다는데, 하얀 꽃은 시험이 시작될 때, 핑크는 시험 기간 중간, 빨간 꽃은 마지막 시험 때 단다고 하는데, 학생과 사진을 찍고 싶다면 시험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는 빨간 꽃을 단 학생과 찍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소가 강을 건너는 모습. ▼ 졸업식장으로 가는 사람들.

학교와 기숙사를 연결하는 탄식의 다리가 보이는데, 시험 후 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이 다리 아래를 지나면서 탄식을 하며 자나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다리 밑을 지나가는 고등학생은 옥스퍼드의 대학교에 입학 못한다는 전설과 연인이 지나가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원래의 탄식의 다리는 이태리에 있으며 재판을 받은 죄수들이 감옥으로 연결된 다리를 건너며 한숨을 지었다하는 베네치아에 있는 탄식의 다리가 그 유래이다.

보들리안 도서관(Bodleian Library)은 영국 최초의 도서관으로 영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700만권의 장서를 보관 중인데 한 줄로 이어 놓으면 190Km에 이른다. 벽에는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제임스 1세의 조각이 있는데 그의 왼손에는 영어 성경이, 오른손에는 라틴어 성경이 들려져 있다. 이곳 학생들의 졸업장 수여 시 라틴어를 사용한다고 하며 졸업장도 라틴어라고 하니 만약 옥스퍼드 대학 영어 졸업장을 보면 가짜일 것이다.

 

이곳 대학들의 본교는 규모가 작어 강의실이 없고 교수 연구실 등의 일부 시설만 있다. 학생들은 외부의 별도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고, 대학 1학년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 이곳의 강의 중 특징은 학생과 교수의 1:1수업인 튜토리얼 클래스(Tutorial Class)’가 주 1~2회 실시되어 학문을 심도 있게 공부하게 된다.

 

대학이 없어 프랑스에 유학 가던 학생들을 위해 이곳 옥스퍼드에 13세기에 3개 대학이 설립되었는데, 그 중 머톤 대학은 현재 가장 좋은 학교로 평가받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에 관광객은 들어 갈 수 없지만 옥스퍼드의 대학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해리포트 영화의 식당 장면으로 유명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는 입장료를 받고 학생들의 식사 시간이 아닌 시간에 식당에 들어가 볼 수 있는데(4인 가족 티켓 17파운드), 이 대학은 헨리 8세 시절 추기경이던 토마스 울지 경에 의해 1525년 세워졌으며 식당 중앙의 벽에는 헨리 8세와 그 주변 인물들이, 좌우벽과 뒷벽에는 역대 총장과 배출된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어 장중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벽에 있는 영웅들의 기를 받아 더 공부를 잘하게 될 것 같아서 부러웠다.

이곳의 또 하나의 명물인 커버드 마켓1774년 세워졌는데 유명한 상점이 많다. 특히 여기의 제과점은 1:1맞춤 제작으로 케익을 만드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사진 1:  커버드 마켓 .  사진 2: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1;1  맞춤 제과점의 케익 .  사진 3:  베티인형이 전시된 인형 가게 .  사진 4: ‘ 안사리 ’ 라는 가게는 한국인들이 안 갈 것 같다 .

옥스퍼드를 뒤로하고 30분 정도 달리니 코츠월드(The Cotwold)의 버포드(Burford)마을이 나타난다. 코츠월드의 코츠는 오두막을 월드는 구름, 언덕을 뜻하며 경기도 정도의 크기인 이곳에는 예쁜 마을이 여러 곳 있고 양을 키우는 산업이 주산업이다.

 

오늘은 그 중 세 곳을 방문하는데 버포드는 마을 분위기가 한적하며 여유로워 보인다. 호텔의 식당에서 점심을 시켰는데 우리 정서와는 다르게도 손님도 없는데 여유롭게 음식이 나온다. 갈 길이 바쁜 하루인데. 음식 맛이 좋아서 용서를 하고 마을을 산책한 후 다음 마을인 버턴 온 더 워터 (Borton on the water)로 간다.

@버포드 마을의 큰 길가 기념품 상점 앞

이 마을은 코츠월드의 마을 중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마을답게 많은 사람들이 강가에 모여 여유를 즐기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얕은 강물 속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고,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오후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은퇴 후 이런 곳에서 살고 싶은데 아내는 도시가 더 좋으며 이런 곳에는 잠시 들러 느끼는 것이 더 좋단다. ‘내가 살던 정든 시골길! 소달

구지 덜컹 되던 길!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한가로이 거니는데 한 외국인이 다가와 사진~”하여 자기 일행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사진기를 달라고 하니 나랑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단다. 짜식! 눈이 살아 있네! 멋지고 잘 생긴 한국인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날 알아보는 이 친구도 멋지게 생겼네! 내 사진기로 너희들 모습 같이 한 장 찍자!

@할 말은 많은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네~ 이 친구의 나라에서 여행 카페에 이 사진이 올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의 또 하나의 명물인 축소판 마을 모델 빌리지로 간다. 이 마을을 섬세하게 축소하여 재현한 이곳의 여기저기를 지나니 내가 마치 소인국에 온 걸리버 같다. 벨기에의 미니 유럽에서도 축소된 예쁜 유럽의 여러 건축물을 보며 감탄했는데 내가 마치 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큰 존재로 느껴지며 작게 축소된 마을이 더 예쁘게 보인다.

코츠월드에서 마지막 들러는 마을은 바이버리(Bibury)‘Arington Row’의 예쁜 집들이 코츠월드 전체를 대표하는 집들로 소개 되고 있고 웨딩화보 촬영도 많이 하는곳이다. 이 마을을 흐르는 강에는 과거 송어들이 많이 살았지만 지금은 수심이 얕아 송어가 없다고 한다. 대신 송어 양식장과 송어 낚시 체험장이 있다. 가이드가 모신 한 분은 평소 회를 좋아 하셔서 이곳까지 초장을 가지고 와 잡은 송어를 회로 먹었다고 가이드가 말해준다!

한 호텔에서 스콘과 티를 시키며 영국의 차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중국에서 유래된 차 문화는 1660년경 찰스 2세의 부인이 포르투갈에서 차를 가지고 와 마셔서 유래가 되었으며, 생물학자인 로버트 포천1700년대 중구에 들어가 차 만드는 기술을 빼내어 보급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차 문화에 비하면 많이 뒤떨어진다고 생각되지만 차는 영국인의 생활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스콘은 가로로 잘라서 ‘Clotted cream’과 잼을 바르는 정도가 아닌 가득 얹어 먹어야 한단다. 평소 식사량이 적은 아내가 스콘맛에 빠져 혼자 두 개를 먹더니 세 개를 더 포장하여 숙소로 가져간다.

 

한 달간의 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빨리 돌아가서 열심히 일을 해야 마땅하지만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언제 또 이런 여행을 할수 있을지?

 

여행 초반 심한 복통으로 여행을 포기해야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찌할 줄 몰라 했던 날을 생각하니 안전하게 여행을 마쳤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하고 뿌듯하다. 돌아가서 내 사랑하는 동료들과 친구, 선후배들과 더 가까이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